2021년은 빠띠가 항해를 시작한 지 5년이 되는 해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방향키를 잡았던 2016년의 첫 마음이 떠오릅니다. 다섯해가 지나는 동안 빠띠는 서로 신뢰하고 협력하는 기반의 민주주의 플랫폼을 만들고, 시민이 직접 기술과 데이터를 활용해 여러 사회를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을 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거나 암초에 부딪혀 흔들리기도 했지만, 민주주의라는 나침반을 따라 이내 방향을 찾고 항해를 계속해왔습니다. 5년이라는 활동을 통해 빠띠는 ‘시민이 자신의 공동체나 지역의 공론장에 참여해 협력적으로 소통하고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과정이 일어나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공간에 ‘시민협력플랫폼’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다양한 현장에서 많은 활동가들과 함께 실험을 통해 시민협력플랫폼의 모습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시민협력플랫폼과 관련한 그간의 활동을 모아 ‘민주주의 항해일지 1.0’를 연재합니다. 1.0이라는 버전명을 붙인 것은, 시민협력플랫폼이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빠띠가 항해를 멈추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더 나은, 더 많은, 일상의 민주주의’를 위해 시민협력플랫폼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연재물을 읽으시며 함께 고민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민이 제안하고 시민이 결정하는 민주주의 플랫폼’. 민주주의 서울(민서)의 캐치프레이즈입니다.
빠띠는 민서의 기획단계부터 결합하여 운영(2018~2019)까지 함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의 경험과 치열했던 고민을 통해 시민협력플랫폼의 토대를 다질 수 있었는데요. 그렇다면, 시민협력플랫폼에서 민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죠? 지금 시작합니다.
‘민주주의 서울’은 행정이 기존에 시도하지 못했던 여러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공간이자, 그 자체가 실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빠띠는 총괄 기획이라는 역할을 맡기 전, 서울시에 두 가지를 제안했습니다.
실험을 통해 가설을 검증하고 적합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애자일’이라는 개념이 보급되면서 확산됐지만, 법과 제도에 따라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정부가 성과가 불분명한 ‘실험’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서울시는 빠띠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실험을 하며 민주주의 서울을 그야말로 찾아나섰습니다.
2017년 2월 9일 빠띠와의 첫 미팅을 마친 서울시 담당자는 내부에서 민주주의 플랫폼 구축을 추진했습니다. 빠띠는 약 6개월 동안 정식 계약이 아닌 자문으로 민주주의 서울을 만드는 데에 기여를 했는데요. 2017년 10월, 민주주의 서울이 베타 버전으로 세상에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2018년에는 앞서 말씀드린 실험의 시간을 보냈고, 2019년에 이르러서야 예산과 전담팀을 갖추고 정식 출범할 수 있었습니다.
팀은 가장 먼저 ‘서울다운 민주주의 플랫폼은 무엇일까’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2017년 당시에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직접 민주주의의 요소를 정부 운영에 담아내야 한다는 사회적인 기대가 있었습니다. 간단하게는 시민이 제안하고 투표로 결정하면 행정이 실행한다는 내용이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과제를 해결하고 어떤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지 설계가 필요했습니다.
우선, 서울시민의 범위를 정해야 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주민등록을 한 시민 외에도 많은 사람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사람도 일하고 생활하고 투자를 합니다. 적어도 디지털 플랫폼 안에서는 시민의 범위를 ‘주민등록’으로 한정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이렇게 확대하면, 1천만이 아닌 2천만에 가까운 사람을 대상으로 플랫폼을 구상해야 했습니다. 대상의 범위가 커질 수록 플랫폼은 더 간단해져야 하고요. 시민이 제안하면 공무원이 답변하던 시절을 넘어 시민이 직접 제안하고 동료 시민과 함께 결정하는 민주주의를 디지털 기술로 실현할 수 있을까요? 이 방향으로 가는 것은 확실했지만 밟아야 할 단계는 없는지 점검이 필요했습니다. 빠띠는 이 단계를 파악하고, 단계별로 민주주의 서울이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정리했습니다.
10만 명 혹은 20만 명은 절대적으로는 결코 작지 않은 숫자지만, 플랫폼이 전체 이용자로 상정하는 2천만 명에 비하면 극히 적은 비율입니다. 0.5% 혹은 1%가 원하는대로 도시의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법으로 규정된 주민투표는 유권자의 3분의 1이상 투표가 진행되지 않으면 결과조차 공개하지 않습니다. 디지털 민주주의 플랫폼에서도 이에 준하는 결정 기준을 가져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대표성을 확인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일한다’ 혹은 ‘산다’는 개념은 단순하지만, 플랫폼 이용자가 실제 그러한지를 사용성을 해치지 않으며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실명(實名)과 주민의 자격 인증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투명하게 알리면서 데이터를 검증할 경로를 확보해야 하는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들은 정당성과 대표성 확보를 위해 해결이 필요한 제도적이면서도 기술적인 과제였고, 최소 2~3년의 시간이 필요한 사안이었습니다 ▲디지털 플랫폼 안에서는 시민의 범위를 '주민등록'으로 한정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서울에는 ‘천만상상 오아시스’라는 플랫폼이 있었습니다. 2006년 개설된 천만상상 오아시스는 UN전자정부상까지 수상할 정도로 전 세계를 놓고 봐도 우수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7년에는 작동이 멈춘 상황이었습니다. 기존의 시민 제안 플랫폼이 왜 잘 운영되지 않는지 그 이유도 파악해야 했습니다. 여러 실질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시민의 제안이 공무원 답변 이후 정책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적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보였습니다. 일부라도 반대하는 시민이 있는 제안은 일선 공무원이 수용하기에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시민의 제안은 정책전문가에겐 허점이 많고 완성도가 떨어졌습니다. 시민 피부에 와닿는 쓰레기, 주차, 교육 등의 문제는 서울시청 담당이 아니거나, 조례 혹은 예산을 변경해야 하는 시의회 사안이거나, 갈등관리를 통해 다뤄야하는 사안이었습니다. 새로운 제안을 실행하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그 업무를 떠안아야 하는 공무원의 입장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기존의 업무 방식이나 시민제안에 대한 인식 변화, 인센티브 구조의 변화 없이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서울시장의 리더십도 필요했습니다. 변화한 시대에 시민 제안의 가치를 강조하며 시정 전반의 분위기는 물론 보상 체계와 연결해 나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숱한 고민과 분석으로 우리가 만드는 민주주의 플랫폼이 ‘숙의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플랫폼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대표성의 문제와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채 자신의 제안을 관철시키기 위한 통로로 활용하는 공간이 아니어야 했습니다. 시민 한 명의 제안은 단순한 아이디어일 수 있지만, 행정이 가진 정보와 자원을 활용해 더 많은 시민이 상황을 이해하고 힘을 합쳐 제안을 발전시킬 수 있는 틀을 갖춰야 했습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교육청, 산하기관 등)나 권한을 가진 공무원과 의원이 하나의 제안이 정책이 될 때까지 각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추는 것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야만 시민이 플랫폼을 신뢰하고, 이곳에서 일어나는 결정이 정당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시민과 서울시가 제안하고, 시민이 함께 논의해 결정하면, 서울시가 실행한다’는 방향성을 가지되, 그 중간 단계로 서울 시민 누구나 함께 논의하는 ‘서울의 공론장’이라는 컨셉이 드디어 완성됐습니다.
글 : 시스(ohyeon@parti.coop)